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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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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이 화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FDA로부터 암 치료제를 승인받았다. 덕분에 주식과 주가  등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유한양행은 알고 있지만 민족기업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내 옆에 조차 젊은 친구들 중에는 노량진에 있는 허름한 빌딩을 가진 '옛날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기업이다. 유일한 박사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회 사업가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신이 전승됐는지유한양행은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업으로 꼽히곤 한다. 

유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살이던 대한제국 시기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유 박사는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돈을 잃어버려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배려로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될 수 있었다. 이들은 성실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다. 유 박사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미국 사회 적응을 도왔다. 유 박사 유년기 인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유 박사는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소년병 학교에 다니면서 주경야독했다. 재미교포 항일집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항일집회에 참여했다가 훗날 일제 순사에게 체포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유 박사는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업은 숙주나물 사업이었다. 풋내기인 그를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서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로에 숙주 포장병이 나돌아 다녔다. 기자들이 이를 보도하면서 숙주나물을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했다.

숙주회사를 경영할 때 일화다.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을 만났다. 부모는 유 박사가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유 박사는 이를 다행스럽게 여겼지만, 유 박사의 아버지는 부끄러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고작 숙주나물장사나 하는 것이 못 마땅했다. 응당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하기를 바랬다.

아버지의 바램대로인지 그가 바라 본 일제 치하의 조선 현실을 목격한 덕인지, 유박사는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귀국 짐은 모두 의약품이었다. 당시에는 약이 매우 귀했다. 결핵약과 안티프라민, 혈청을 저렴하게 판매했다. 일제가 의약품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시절, 조선인은 유박사가 일본의 눈을 피해 보급한 약품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1928년 유한양행은 최초 신문광고를 냈다. 당시 제약사는 광고를 낼 때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이라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유 박사는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혔다.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하기도 했다. 

유 박사는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윤리 경영을 실천했다.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다.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됐다. 숙주나물을 팔던 시절 거래처인 녹두사장이 탈세로 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는 썰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모범납세법인으로 뽑힌 일화가 재미있다. 박정희 정부 때 정경유착은 극심했다. 정주영의 현대그룹이 대표적이다. 정치 자금을 줘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 받아 대기업이 되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유 박사는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유한양행은 세무조사 대상이 됐다. 일종의 괘씸죄였다. 하지만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받았음에도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지 않아도 될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가에 이바지한 기업에 누명을 씌운다는 비난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법인과 개인 모두에게 상을 준다. 서슬퍼런 시절, 귀에 걸면 귀걸이이던 시절에도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대단했는지 밀어 짐작할 수 있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종업원지주제도는 종업원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특별한 목적과 방법으로 소유하는 제도다. 요즘에는 '자사주'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경영상의 이점도 이점이지만 노동자도 회사의 성장과 함께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한 유 박사의 철학이 영향을 미쳤다.

유 박사는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 등 기업 역할에 대해 일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유 박사는 사업을 영위하는 동안 독립활동도 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전략정보국(OSS)에서 한국 정보 담당자로 활약했다. 미주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했다. 이런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제는 유한양행을 세금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6년 미국에서 돌아온 유 박사는 초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올랐다. 쑥대밭이 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고려공과기술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해 재건 토대를 다졌다.

그 후 유행양행을 경영했고 은퇴하면서는 가족에게 회사를 맡기지 않았다.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했다. 전문 경영인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죽을 때도 손녀 유일링의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한국사회와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피가 어디 안갔는지  유일링의 아버지이자 유일한 박사의 아들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실제로도 딸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유족들은 유일한의 결정을 전혀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도를 가족 몫으로 주겠다고 한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2015년 땅콩회항 사태 때 그것이알고싶다에서 모범사례를 소개하기 위해 유한양행에 연락을 취했는데 유 박사의 자손이 어찌나 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았는지 사측은 연락처조차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유일한 박사의 추모 행사나 혹은 유한재단에서 여는 시상식에 아주 가끔 참석하는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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