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 시대에는 호환이 일상이었다. 태종실록, 숙종실록을 보면 수 백명 단위로 물려 죽은 기사가 나온다. 철종 때는 4000명에 육박했다. 팔도 백성이 맹수들에게 갈갈이 찢기고 잡아먹혔다. 심지어 임금의 궁궐 한 복판 까지 호랑이가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착호 갑사를 조직했다. 갑사는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을 제외하고는 조선군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던 병종이다. 호랑이만을 잡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인만큼 왕명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는 특권, 소위 말하는 선조치 후보고도 가능했다.
착호 갑사들은 식인 맹수에게 지인을 잃은 복수자들로 이뤄졌다. 사실 처음에는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에서 이례적으로 능력만 있다면 종 4품에 올리겠다는 당근을 제시했음에도 지원자가 없었다. 뜯어 먹히는 두려움에 섣불리 누구하나 나서지 않았다.
착호 갑사들의 봉급은 맹수를 추격하는 동안의 숙박비, 장비 값, 치료 값 등을 빼면 남는 게 없었다. 게롤트의 삶과 유사했다. 게롤트는 여자들을 홀리고 다녔지만 착호 갑사는 그러지도 못했다.

이들의 선발 과정은 혹독했다. 맨손 격투로 5명과 싸워 이겨내야 했다. 30kg을 손에 들고 백보를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체력과 근력도 요구됐다. 맹수와 추격전을 위해 말을 타고 마상 격투술도 할 수 있어야했다. 창술과 검술은 기본 소양이었다. 연금술 빼고는 그저 위쳐였던 것이다.
마지막 선발 시험은 실제 호랑이를 죽이는 것이었다. 고대로마 검투사처럼 호랑이랑 싸워 이긴 사람만 착호 갑사가 됐다.
세종 때 조직 된 초대 착호 갑사는 40명 규모였다. 전국 팔도 식인맹수가 나타났다면 달려갔다. 효율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각자 역할을 나눴다.
맹수를 추적하고 덫을 설치하는 조
거대한 철궁을 들고 원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는 저격조,
맹수를 몰아넣기 위해 위협사격을 하는 화력지원조,
마지막으로 차오가 칼을 들고 호랑이와 근접전을 펼치는 백병전조가 있었다.
거대한 철궁을 들고 원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는 저격조,
맹수를 몰아넣기 위해 위협사격을 하는 화력지원조,
마지막으로 차오가 칼을 들고 호랑이와 근접전을 펼치는 백병전조가 있었다.
초대 착호 갑사 40인은 출신이 비천했으나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후대 착호 갑사들의 대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각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기도 했고 궁궐호위에 선발되기도 했다. 착호갑사들이 식인 맹수를 무찌르고 귀환하면 백성들이 줄 지어서 환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440명 까지 부대가 커지기도 했다.
착호 갑사들은 인조반정 때 한 축을 맡기도 했다. 반정군은 광해군을 속이기 위해 호환이 심하다고 거짓보고를 올려 착호 갑사 통솔권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