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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성없는 이야기

매국노 0티어, 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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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매국노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테지만 이완용 만큼 대명사격으로 불리는 이는 없다. 그런데 이 이완용보다 더 악질적인, 이완용조차 하지 못했던,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옥새를 뺏은 이가 있으니 바로 윤덕영이다.

참 윤덕영은 윤치호와 같은 해평윤씨다.  윤석열 대통령은 파평윤씨다.  헷갈리지 말자. 대통령 중에는 윤보선이 해평윤씨다. 

아니 이런 게 자동완성되길래...

아무튼 윤덕영은 관직에 오를 때부터 조부 윤용선의 후광 덕분에 요직으로 시작했다.  윤용선이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 원로 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원래 금수저였던 윤덕영의 출세길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조카였다. 동생 윤택영의 딸인 조카가 순정효황후에 책봉됐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 궁중을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다.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한일합병의 불가피성을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은 마지막 남은 권력을 내주지 않았다. 이완용을 믿은 일본은 초조해져가고 있었다.

이 때 윤덕영이 나서 고종에게 찾아가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요즘으로 치면 압류 딱지)을 붙였다.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다. 고종이 움직이지 않자 고종의 여자문제로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이 조금 반응을 보이자 윤덕영은 고종 앞에서 뻗치기를 시전했다. 

질려버린 고종이 순종을 보내 윤덕영을 만나게 했다. 당시 윤덕영의 태도는 옛 신하로서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근처 상궁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다. 독립협회 회장이었으나 친일로 전향한 윤치호가 "저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윤덕영의 하이라이트는 경술국치 일주일 전이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 할 것을 강요했다. 병풍 뒤에서 숨어서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치마 속에 숨기며 항의했다. 맞다. 윤덕영의 조카 딸이다.

이완용 등은 아무리 친일파라지만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신의 예고 다 떠나서 아녀자의 몸을 함부러 만지지 않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이때  윤덕영이 나섰다. 그리고 치마를 들췄다. 옥새를 빼았었다. 우는 황후를 뒤로한 채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됐다.

치마를 들추는 그림을 그려달라니까 챗지피티나 그록이나 둘 다 안된다고 했다. ㅋ

윤덕영은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일제는 군신 간 예의나 종친 간 의리를 도외시하고 막후에서 활약한 그의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일제는 윤덕영에게 자작 작위를 내렸고 벽수산장도 줬다. 그는 중추원 고문을 15년 중임하고 중추원 5대 부의장에 오른다. 
윤덕영은 1940년에 죽는데 매국 대신 중 두 번째로 오래 살았다. 역시 욕먹어야 오래 사나보다.

윤덕영은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다. 지금 옥인동의 절반 이상이 윤덕영 소유였다. 서촌, 수성동계곡, 인왕산, 배화여고 등등이 윤덕영의 집이었다. 면적은 이완용 땅의 4배에 달했다. 

윤덕영은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 초임 봉급이 50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궁궐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는 벽수산장

그의 재산 중 대표적인 건 벽수산장인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지하1층 지상 3층 연건평 800평에 육박하는 호화 대저택이었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자재만 썼다.  보일러 시설도 갖췄다. 응접실 천장에 수족관을 두며 금붕어를 길렀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화려했다. 마당 역시 규모가 컸다. 궁궐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었다.
여전히 옥인동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대부분 타서 없어졌지만 정문 기둥 일부는 남아있다.

그의 아내 역시 대단했다. 아내 김복수는 일제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 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섰다. 내조의 여왕이라 할 수 있겠다.

다행히도 윤덕영 집안은 말년에 흥청망청 돈을 써대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래서 후광을 누리는 후손도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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